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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과 예배를 받으신 예수님 - 제 4과 - 2021년 3월 28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19장 29-40절

글쓴이 : 강호길 날짜 : 2021-03-29 (월) 11:09 조회 : 27

장년성경연구 지도자 교안
2021년 3월 28일 주일 용

 

번역 및 편집: 강 호길
hokilkahng@hotmail.com

 

제 4과  

 

 

찬양과 예배를 받으신 예수님                  

 

 

학습구절: 누가복음 19장 29 - 40절

 

성경진리: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예배하며 찬양할 성자 하나님이시다.     

 

주요교리: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다 (눅 4: 41).     

 

암송구절:  누가복음 19장 40절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I tell you,” he replied,

“if they keep quiet,

the stone will cry out.”

 

 

시작하는 글:  

 

하나님은 우리 인간(人間)을 예배하는 존재(存在)로, 즉 하나님을 예배(禮拜)하도록 지으셨다.

모든 성경(聖經)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가리키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예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 되신다는 뜻이다.

더욱이, 복음서들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예배로 예수님께 응답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예배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주신다.

예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진리와 함께, 성경은 그같이 하는데 필요한 은혜와 증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계시하실 때 그의 선하심을 입증하여야 한다.    

 

예수님에 관한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예배하게 합니까?  

 

 

본문 배경설명

 

누가복음 19장 28절로부터 48절까지
 

     여리고 성에서 “삭개오”를 만나신 후 (눅 19: 1 -10),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정(旅程)을 계속하셨다.

그러는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을 계속해서 가르치셨다.

사역하실 수 있는 그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가올 일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기를 원하셨다.

어떤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줄로 생각”하였다 (19: 11).

자주하셨듯이, 예수님은 한 비유(比喩)를 드셔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그들의 오해(誤解)를 설명하고 고쳐주셨다.

그것이 19장 11절부터 27절까지에 기록되고 있는 “은 열 므나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두 가지 사실(事實)이 강조(强調)되고 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복음 전파와 섬기는 사역의 청지기 직분(職分)을 제자들의 손에 맡기고 떠나실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어느 날 돌아오셔서 그의 왕국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청지기 직분에 대한 책임(責任)을 물으실 것이다.

    그 비유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의 동쪽에 나있는 길을 걸어서, 예루살렘을 향해 건너가는 길목에 도착하였다.

일행이 감람원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동네 근처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면서 지시(指示)하셨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19: 30).

그들은 예수님의 지시에 순종하였다.

이 보잘것없는 짐승을 타시고, 예수님은 거룩한 성인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다.

그 후에 일어난 사건(事件)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권리(權利)의 몇 가지 측면(側面)을 보여준다.   

     첫째로, 예수님은 사람들의 찬양과 예배를 받으셨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큰 무리의 사람들이 그를 앞뒤로 에워싸고 가며 어떤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서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서 길에다 펴며 환호하였다.  

그들은 큰 소리로 찬양하기를,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고 하였다 (19: 38).

실제로, 그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셨다.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셨을 때, 예수님은 수세기 동안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의 초점이었던 “성을 보시고 우[셨다.]”   

40년 안에, 그 성은 침략(侵略)을 당하고 성전은 파괴(破壞)되고 말 것이다.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은 백성들이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인해, 주후 70년에 로마군인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를 당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건물(建物)들보다도, 백성들을 인하여 더 슬퍼하셨다.

그들은 회개하고 주님께 순종 할 수 있는 기회(機會)가 여러 번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繼續) 거절함으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할 정도로]” 멸망을 받게 될 것이다 (18: 41 -44).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성전 뜰을 남용(濫用)하는, 혹은 더럽히는 것에 대해 의로운 분노(憤怒)를 나타내셨다.

‘이방인의 뜰’로 지정되었던 지역은 희생제물로 드릴 짐승들을 파는 상인들로 가득 차있었다.

짐승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의식은 이스라엘 백성의 성전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희생제물로 드리는 짐승들은 우량(優良)하고 흠이 없는 것이어야 하였다.

당시에 먼 길을 오면서 짐승들을 상처나 흠이 나지 않게 끌고 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성전에는 검사관들을 두어 짐승들을 검사하고 불합격시키는 일까지 있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에게 임대료를 내고 합격품 짐승들을 파는 장사를 하는 상인들이 생겨났다.

또한 모든 유대인 남자들은 매년 반 세겔의 성전 세를 내도록 요구되었다.

그것은 약 2일간의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는데, 반 세겔짜리 성전 동전이나 갈릴리 세겔로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성전 세를 그들의 마을에 있는 징수 장소에서 지불할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러 예루살렘에 왔을 때 성전 세를 납부하였다.

돈 바꾸는 자들은 수수료를 받고, 반 세겔짜리 ‘성전용 동전’으로 바꾸어주었는데, 그들은 지나치게 수수료를 부과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신적 권위를 주장하시면서, 예수님은 그들을 성전 뜰에서 쫓아내시고 그들의 사악한 행위를 꾸짖으셨다 (19: 45-48).

     넷째로,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동요하거나 위축되지 않으시고 가르치는 사역을 계속하셨다 (19: 47).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을 간절히 원하여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으므로 그들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19: 48).

 

 

학습구절 연구

 

예수님께 순종하라 (누가복음 19장 29 -34절)  

 

신약 성경의 네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결정적인 유월절을 축하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일을 기록하고 있다 (마 21: 1 -13; 막 11: 1 -11; 눅 19: 28 -48; 요 12: 12 -19 참조).

예수님은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일을 세밀(細密)하고도 면밀주도하게 계획하고 실행하심으로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 왕으로 오고 있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으셨다.

 

누가복음 19장 29 -30절


●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둘을 보내시며
●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고 계실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 (눅 9: 51).

예수님은 그 여정을 계속하시면서 마을에 들려 사역을 하시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일을 하셨는데, 이제 그들 일행은 예루살렘 인근의 감람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라는 두 마을 가까이에 이르게 되었다.

'덜 익은 무화과의 집'이라는 뜻이 되고 있는 “벳바게” 마을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였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그 마을은 ‘대추 야자의 집’이라는 뜻으로 당시에 잘 알려져 있던 “베다니”와 가까운 곳이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베다니는 복음서에서 나사로와 마리아와 마르다 세 남매가 살았던 마을로 잘 알려지고 있다 (요 11: 1).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자주 그곳에서 머무셨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2 마일 정도 떨어져 있던 마을로,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위치해 있었다.

여리고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온 순례자(巡禮者)들과 여행자(旅行者)들은 감람 산 언덕을 넘은 다음 기드론 계곡을 건너 동문을 통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다.

우뚝 솟은 감람 산은 성전 지역의 멋진 전경을 제공해 주었다.

     “감람 산”은 구약에서 다윗 왕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하여 도망쳤던 곳으로(삼하 15: 30 참조) 그리고 선지자 에스겔이 환상으로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나 머무르고 있던 “성읍 동쪽 산”으로 (겔 11: 22 -23 참조) 언급(言及)되고 있다.   

스가랴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슥 14: 3 -5 참조).

감람 산”은 또한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습관을 따라” 마지막으로 찾아와서 그를 잡으려는 무리가 올 때까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장소가 되고 있다 (눅 22: 39 -46 참조).

     벳바게와 베다니 마을 근처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제자 중 둘”을 보내어 준비하는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게 하셨다.

복음서의 어느 기록도 이들 두 제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고 하셨다.

누가는 마을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마가복음 11장 1절과 누가복음 19장 29절에서 벳바게와 베다니가 함께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보면, 두 마을은 같은 지역에 있었던 것 같다.

두 마을 중 어느 것이 되었든 간에, 그 두 제자가 이웃 마을로 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제자들의 임무는 그 나귀를 풀어서 예수님께로 끌어오는 것이 되고 있다.

전지(全知)하신 예수님은 초인간적(超人間的)인 지식(知識)으로 나귀 새끼가 있는 곳과 그것을 끌어다 쓰실 수 있는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끌고 오라”고 지시하셨을 수 있다.

아니면, 예수님은 자기를 믿고 따르는 나귀 주인과 사전(事前)에 약속을 하고 제자들에게 그같이 지시하셨을 수 있다.

어느 경우가 되었건 간에, 그것은 두 제자가 선뜻 받아들이기 쉬운 지시가 아니었다.

그들은 왜 예수님께서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원하시는지 그리고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허락도 받지 않고 어떻게 그것을 “풀어 끌고” 올 수 있는지 등 여러 가지 의문이 있을 수 있었다.

두 제자는 단순히 주님의 지시에 순종하였다.

그들의 전적인 순종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의 증거가 되었다.

실제로, 그들 두 제자는 자기들이 하는 일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에 메시야와 왕으로 입성하시도록 준비를 갖추어 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어떤 일을 하도록 지시하실 때, 그 뜻과 목적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는 축복을 받는다.  

두 제자가 예수님의 지시를 받고 그같이 순종한 것은 며칠 후에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일어날 일과 비슷한 일이 되고 있다 (눅 22:13).

 

누가복음 19장 31 -34절


●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 지라
●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두 제자가 묻지를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남의 나귀를 풀어서 끌고 오려고 했을 때 주인이 나타낼 반응에 대해 미리 생각하고 계셨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나귀를 푸느냐고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대답하라고 지시하셨다.

"주"라는 용어는 자주 권한과 소유권을 나타내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나귀 주인은 그 말이 의미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가서 나귀를 찾았다.

그리고 “나귀 새끼를  때에” 나귀의 주인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에게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물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주께서 쓰시겠다”고 대답하였다.

 

신자들은  때때로 주님  순종하기를 주저합니까?

우리의 순종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예배하는 형태가 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찬양하라 (누가복음 19장 35 -38절)

 

제자들이 나귀를 끌고 왔을 때, 예수님은 감람 산으로부터 기도론 골짜기를 건너서 예루살렘의 동문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계셨다.  

오래 전에, 다윗 왕과 그의 측근들은 왕의 아들인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울면서 이 길을 따라 예루살렘 성을 떠나 감람 산으로 갔었다 (삼하 15: 30 참조).

이제 다윗의 자손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놀라운 찬양과 환호를 받으며 바로 그 길을 따라 성 안으로 들어가실 참이었다.  

 

누가복음 19장 35 -36절:


●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나귀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님을 태워드렸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펴더라”고 한 말은 그가 왕으로 오시는 것을 인정하며 환영하는 일이 되고 있다.

그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추종자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확실하지만, 그 말은 또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고 있던 순례자들도 포함할 수 있다.

    일부 성경학자들은 고대의 왕들이 일반적으로 평화시기에는 나귀를 탔고 전쟁 때에는 말을 탔던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때 예수님은 정복군의 장군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겸손한 인자로서 예루살렘에 들어 오셨다.

예수님은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대항하여 싸우실 수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의 계획에 자신을 맡기셨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을 때 겸손을 나타내 셨지만, 그는 또한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통치 할 약속된 다윗의 자손이자 왕이 됨을 선언하였다 (삼하 7: 12-13 참조).

 

누가복음 19장 37 -38절:


●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1세기의 여행자들과 순례자들은, “감람 산 내리막 길”을 내려와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 예루살렘의 동문으로 들어오곤 하였다.

오늘날 까지도 그 길은 도시의 멋진 전망을 제공해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제 바로 그 길을 나귀 새끼를 타고 내려 오시자,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였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그 광경을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를 높여” 찬양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 21: 9).

누가는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라는 말로, 그들이 그같이 기뻐하며 찬양하는 이유를 밝히며 특별히 강조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으로 소경이 다시 보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고, 죽은 자가 살리심을 받는 등 기적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일들을 수 없이 목격하였다. 

그들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구약에 예언되고 있는 메시야가 왕으로 입성하시는 것으로 환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제자의 온 무리”는 시편 118: 26을, 한 가지 내용을 바꾸어서,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순례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러 성전으로 올 때 그들을 환영하는 찬양 시로 사용되었다.

구약의 맥락에서, 이 구절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를 환영하며 축복하는 말이 되고 있다 (시 118: 26).          

누가 복음에 따르면, 예배하는 군중은 그들이 환영하는 대상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명시하고 있다.        

    누가 복음과 사도 행전에서는 예수님의 왕권(王權)이 강조(强調)되고 있다 (눅 1: 32; 18: 38 -39; 23: 3, 37 -38; 행 17: 7 참조).

누가 복음에서 “왕”으로 표현되고 있는 말은 마태 복음과 마가 복음에 나오는“다윗의 자손”이 라는 말과 같은 뜻이 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실현(實現)되지 않았지만, 왕은 이미 오셨고, “제자의 무리”는 그를 왕으로 환영하며 찬양하고 있다.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認定)하는 것은 오늘날 신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메시야”라는 용어(用語)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구약 성경의 언약은 세 가지의 직분 자를 기름을 부어 세움으로 직분을 맡아 섬기게 하였는데, 그들은 예언자들 (왕상 19: 16)과, 제사장들 (출 29: 7 -9), 그리고 왕들 (삼상 10: 1; 16: 1, 12 -13)이 되고 있다.

예수님은 궁극적(窮極的)인 선지자, 대제사장, 그리고 왕으로 오셨다 (히 1: 1 -2; 9: 11; 계 17: 14 참조).

신자들이 구원을 받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죄와 사망에서 구해주시는 구세주로 믿을 뿐 아니라, 삶의 주인으로 믿는다.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일은 예수님이 다윗의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가 되시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 될 뿐 아니라, 그를 믿는 사람들이 그의 권세와 통치를 받아들이며 복종하는 것을 뜻하는 일이 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뜻과 욕망에 따라 계속 살아가게 하려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또한 신자들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구원해 주셨다.  

신자들은 자신들이 목격하고 경험한 바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예수님을 경배하며 예배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성도로 변화시키실 때, 이 땅에서 그의 기적적인 사역은 계속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을 때, 우리를 축복하시는 그의 사역이 끝난 것이 아니다. 

신자들을 축복하시는 그의 사역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축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랑 하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분을 찬양하는 합창에 동참해야 한다 (엡 5: 2).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제자의 온 무리”는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는 말로 그를 찬양하고 있는데, 그것은 누가복음 2장 14절에서 천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찬양한 것을 상기시켜주는 일이 되고 있다.

그때 천사들은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평화를 선포하였는데 반해, 여기서는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평화”를 찬양하고 있다.

그 같은 변화는 하나님이 평화의 근원이 되시며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신자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시는 도구가 되시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엡 5: 1 참조).

    

그리스도의 어떤 면들이 당신으로 하여금 그를 찬양하게 합니까?
당신이 주님을 찬양하는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19장 39 -40절)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을 목격(目擊)하는 모든 사람이 그를 경배하며 예배한 것은 아니다.

누가 만이 예수님과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入城)하는 것을 경배하며 찬양한 제자들과 군중들을 비난(非難)한 바리새인들 사이의 대화(對話)를 본문에 기록한 유일한 복음서 저자(著者)가 되고 있다.

예수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비난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예수님이 그 자신을, 그리고 제자들과 군중들이 보인 경배와 찬양을 어떻게 이해하셨는지를 들여다 보게 하는 중요한 통찰력(洞察力)을 제공해주고 있다.   

 

누가복음 19장 39절:


●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여리고에서 삭개오를 만나신 후 (눅 19: 1 -10 참조), 예수님은 그를 믿기를 거부한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비유를 말씀하셨다 (눅 19: 11 -27 참조).

그 비유에서, 예수님은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간 어떤 한 “귀인”(貴人)을 묘사하셨다 (눅 19: 12).

예수님은 또한 그 귀인을 미워하며, “이 사람이 우리의 왕이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인이 그들을 다스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묘사하셨다 (19: 1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바로 전에 말씀하신 비유를 성취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오시는 구약에 약속(約束)된 메시야로 인정(認定)하기를 거부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으로 부르면서, 그를 ‘메시야-왕’으로 찬양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강요하였다.

     예수님을 적대하는 사람들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행동과 말을 신성 모독으로 보았다.

그들은 무엇에 대해 화가 났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두 가지 관점(觀點)에서 생각할 수 있다.

     실질적(實質的)인 관점(觀點)에서 볼 때,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이자 왕으로 말하는 것은 로마정부에 경계심(警戒心)과 반란(叛亂)에 대한 소문을 불러 일으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군사적(軍事的) 탄압(彈壓)과 진압(鎭壓)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로마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였다는 것이 실제로 종교 지도자들이 나중에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고발한 핵심적인 혐의(嫌疑)가 되고 있다 (눅 23: 2 참조).            

     신학적(神學的)인 관점(觀點)에서 보면, 예수님을 적대한 이들 종교지도자(宗敎指導者)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나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認定)하지 않았다.

그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 한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시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행하는 제자들의 행동과 말을 예배의 행위로 생각하였다.

     예수님이 누구냐는 그의 정체성(正體性)은 그를 믿지 않는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의 근본적(根本的)인 차이점(差異點)이었다.

그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단지 하나의 “선생”으로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그릇된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던 위험인물로 생각하였다.

예수님에 대한 질투심과 거짓 예배로 생각한 것에 대한 독선적인 분노 감이 합쳐져서 예수님에 대한 강렬한 적대를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누가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마지막 때가 되고 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때때로 바리새인들의 초청을 받아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고 기록하였다 (눅 7: 37; 14: 1 참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배제(排除)하지 않으셨으며, 실제로 요한 복음서는 니고데모라는 바리새인이 구원을 받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요 3: 1 -21; 19: 39 참조).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거부하고 저항하며 심지어 핍박했던 한 사실은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에 대한 누가의 묘사(描寫)를 더욱 극적(劇的)인 사건(事件)으로 만들고 있다 (행 9장 참조).    

 

누가복음 19장 40절:


●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책망하도록 압력을 가했지만, 예수님은 대신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다.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으로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 물으신 적이 있다 (눅 9: 18 참조).

그의 정체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러면서도 잘못된, 몇 가지 대답을 들으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눅 9: 20).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代表)해서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눅 9: 20).

그 때, 예수님은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때가 될 때까지 이 진리를 널리 알리지 말라고 경고(警告)하셨다.

이제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히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가 가까이 왔으므로, 그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알릴 때가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군중들이 공개적으로 그를 “하나님의 메시야”로 찬송하며 예배하는 것을

환영하셨다.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대답하셨는데,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어떤 성경주석자들은 그 말이 하박국 2장 11절의 말씀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데, 그것은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고 한다.

그 말의 문맥의 뜻은 바벨론의 죄악이 너무나 크고 심각하기 때문에 심지어 생명(生命)이 없는 구조물(構造物)들까지도 그들의 죄악상(罪惡相)을 부르짖을 것이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가끔 그의 피조물들에게 인간(人間)의 불순종(不順從)에 대해 증언하도록 요구하셨다 (사 1: 2; 미 6: 1 -2).

그 말의 뜻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세계에서 타락한 천사들 (사탄과 그의 악령들)과 인간 만이 창조자(創造者)의 뜻에 불순종(不順從)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성경해석자들은 소리 지르는 돌에 대한 언급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가리키는 것으로 믿고 있다.

적어도 그 것은 말할 수 있는 창조물이 아무도 진리를 말하지 않을 때 말하지 못하는 피조물이 어떻게 그 진리를 증거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되고 있다.

이 구절의 핵심(核心)은 예수님이 메시야,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군중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신성(神性)을 주장하셨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제자들과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일은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豫言)을 성취하는 일이 되고 있다.

주전 6세기에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는 유대 백성들에게 사역했던 스가랴 선지자는 그들을 “이스라엘의 딸아”라고 부르면서 ‘구원을 베풀 왕’에 대해 예언하기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리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하였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경배와 예배 그리고 순종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오늘 날, 우리는 우리의 시간과 재능 그리고 소유물로 예수님을 예배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믿는 자들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라고 하면서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한다.

우리는 먼저 겸손한 종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그의 뜻을 알고 행하기를 힘쓴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 이시라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 하시겠습니까?



말씀을 나의 상황에 적용하기:


●    예수님에게는 그를 경배하며 예배하는데 필요(必要)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     
●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과거에 행하신 그리고 지금도 행하시고 있는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예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여야 한다.
●    만물의 창조주(創造主)와 우리 삶의 주인(主人)이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경배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반원들과 함께 예배에 필요한 기본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토의하십시오.
필요한 기본 요소들로 당신이 작성한 목록은 예배에 대한 당신의 이해(理解)를 어떻게 형성해 주고 있습니까?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곰곰이 그리고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되새김으로 예배의 마음이 생겨나게 하십시오.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가 행하신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이 장년 성경연구 지도자 교재는 LifeWay에서 출간하여 보급하고 있는 Explore the Bible 교과과정의 학생용 한국어 교재를 가르치고 배우는데 도움이 되도록, 강 호길 목사가 LifeWay의 허락을 받아 영어 지도자 교재를 번역 및 편집한 것입니다.
그같이 허락한 LifeWay에 감사를 드립니다.
장년 성경연구 한국어 학생 교재는 LifeWay에서 주문하여, 장년 주일학교 시간에 혹은 목장이나 구역 모임에서 성경공부 교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